이윤재 학생에게 보내는 공개 질문
생각 2008/06/13 04:19
이윤재 학생에게 보내는 공개 질문
[잡감] 서강대 이윤재 학생의 발언 중 일부를 듣고
서강녀.라고 해서 무슨 소리인가 몰랐는데, 다음 아고라에 들어가 보고 나서 무슨 소리인지 짐작 할 수 있었다. 어제 있었던 100분 토론에서 서강대 경영학과 학생 중 하나가 발언한 내용에 대한 집단적 비난의 소리였다. 시간과 여건상 100분 토론의 전체를 보지는 못하였고, 그 중 문제의 서강대 학생의 발언만을 들어 보았다.
들어본 결과.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수 없다. 그것이 이 [잡감]을 쓰고 있는 이유다.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경영학과 학생이니 문과 출신일테고 혹시,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읽어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운이 좋게도 2학년 토론대회에 나갔을 때, 제시된 책 중의 하나라서 읽어 본 적이 있다. 갑작스럽게 왜 '폭력과 성스러움'이 나오느냐 하면, 그 이운재 학생이 지적한 부분이 이 책에서 나오는 내용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윤재 학생이 발언한 요지는 '불법'집회는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명제다. 불법은 불가다. 과연 그러한가? 어떠한 경우에도 '法'은 그 '성스러움'을 침탈 받을 수 없는 고귀한 성질의 것인가? 도로를 점거하고, 법에 명시되지 않은 집회와 시위를 여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나는 '法'에 부여된 '성스러움'의 가치를 그다지 높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의 주된 내용은 '폭력의 구조에 성스러움의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배계층의 지배구조에 부여된 폭력성, '법'에 부여된 폭력성 등을 다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法'이란 지배자들의 이해구조에 부합하도록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사용된 하나의 도구일 따름이지 '절대 명제' 혹은 '절대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뜻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다시 서강대 이윤재 학생의 생각을 되짚어 본다. 합법과 불법을 나누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현실의 실정법에 있다' 그렇다면 실정 법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유효한 명제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인가? 이윤재 학생은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해야 한다. 법과 폭력의 구조에 대한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담론으로 이 문제가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알베르 까뮈 '불의보다는 무질서를 택하겠다'
프랑스에는 알베르 까뮈가 있다. '이방인'으로 유명한 소설가. 심지어 나조차 그 소설을 읽어 보았으니 뭐 유명하긴 한가 보다. 아무튼 그가 한 말이 있다 '불의보다는 무질서를 택하겠다'
무슨 말인고 하면 불의를 위해 질서를 지키기 보다는, 무질서를 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불의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말이 되겠다. (중언부언같지만 여튼 그렇다.) 법이란 무엇인가? '도로교통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다 '질서'에 관한 법률이다. 도로에서의 질서를 유지하고, 집회와 시위를 통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이다.
질서는 무엇인가. 질서는 과거에 있었고 어제에 있었던 것이 오늘도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어제 출근했던 사람이 오늘도 출근하고, 어제 다니던 차길로 오늘도 차가 다니고. 이것이 질서다. 이것이 법이다. 알베르 까뮈가 역설한 사실이 가슴에 와 닿는가? 굳이 감성에 호소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성에 호소해 보겠다. 아프리카에는 '두알라'라는 나라가 있다. 뭐 들어 보았든 안 들어 보았든 상관은 없다. 이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최빈곤국의 순위권에 손꼽히는 나라고, 세계적으로 독재로 악명이 높은 국가다. 대통령과 관료들은 자신을 이해관계를 위해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상식적이고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 뭔지 아는가? 상습적인 뇌물과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어마어마어마한 손실이다. 관료주의적이고 부패한 공무원들이 벌이는 행정들. 놀랍게도 이것이 그 나라의 '질서와 법'으로 통용되고 있다.
세계에서 '불법'적인 '독재'는 존재한 적이 없다. '독재'는 언제나 '합법'적이다. 믿을 수 없다고? -_-; 머리를 조금만 굴려봐라. 어느 미친 독재자가 스스로를 '불법'으로 규정하겠나.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법'과 '질서'를 자신의 구미와 이해관계에 맞추어 고쳐 나가는 것이 '독재자'들의 공통된 성질이다. 세상에 불법적인 독재는 없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때론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사회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이 잠재적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 경영학과에서 공부한다는 이윤재 학생이 답할 차례이다.
윌리엄 고드윈 '수상록'
'법'이라면 까빡 죽는 사람들이라면 못 믿을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심지어 '법' 없이 살아보자는 주장을 한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나키스트계열이고 그 중에 내가 아는 건 '윌리엄 고드윈'이다.
그는 심지어 '다수결'조차 거부했고 '결혼제도'에 대해서도 맹비난했다. '다수결'은 숫자놀음에 의한 횡포였고 '결혼제도'는 개인에 대한 사회의 억압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사표현과 자기결정의 자유에는 그 어떠한 집단적 전체적 제제가 가해져서도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심지어 그의 '유토피아'에는 교도소도 없다.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은 그 사람은 남은 생애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그의 '형벌'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포스트 모던에 들어서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요즘 한창 뜨는 싸이코 패스라든지)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도덕관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극단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세상에 '법'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당당한 개인이라면 '국가'와 '법'에 목매이지 말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다. '법'이라는 폭력에 부여된 '성스러움'에 기죽지 말고 그것을 의심하고, 언제든지 깨 부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시민'이다. (국민이 아니라 시민.)
공대생이 경영대생에게
나는 공대생이다. 그럼에도 경영대나 문대나 사회대나 어디든 간에 이야기와 소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 요즘이야 학문간에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사상이야 오죽하겠는가? 이제는 도저히 옛날의 잣대로는 사상을 가늠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진정한 '다원화'의 시대이며 진정한 '토론'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토론'의 시대에는 더 이상 조용한 날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문제와 사안에 관해서도 수십, 수백가지의 의견이 대립할 것이다. 그럼에도 결과는 나고야 말것이다.
결과가 나는 과정이 '마녀 사냥과 다수에 의한 소수의 묵살'이 될 수도 있고, '서로의 설득에 의한 타협과 합의'가 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되기를 바란다. 전자의 경우에는 우리가 이룩한 '민주사회'가 과거 '독재사회'의 기본 메커니즘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2008/06/05 - [생각] - 거리행진에 참가하는 조직에 대한 생각
2007/08/10 - [생각] - 집단과 개인의 긴장성에 대해서.
[잡감] 서강대 이윤재 학생의 발언 중 일부를 듣고
서강녀.라고 해서 무슨 소리인가 몰랐는데, 다음 아고라에 들어가 보고 나서 무슨 소리인지 짐작 할 수 있었다. 어제 있었던 100분 토론에서 서강대 경영학과 학생 중 하나가 발언한 내용에 대한 집단적 비난의 소리였다. 시간과 여건상 100분 토론의 전체를 보지는 못하였고, 그 중 문제의 서강대 학생의 발언만을 들어 보았다.
들어본 결과.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수 없다. 그것이 이 [잡감]을 쓰고 있는 이유다.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경영학과 학생이니 문과 출신일테고 혹시,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읽어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운이 좋게도 2학년 토론대회에 나갔을 때, 제시된 책 중의 하나라서 읽어 본 적이 있다. 갑작스럽게 왜 '폭력과 성스러움'이 나오느냐 하면, 그 이운재 학생이 지적한 부분이 이 책에서 나오는 내용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윤재 학생이 발언한 요지는 '불법'집회는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명제다. 불법은 불가다. 과연 그러한가? 어떠한 경우에도 '法'은 그 '성스러움'을 침탈 받을 수 없는 고귀한 성질의 것인가? 도로를 점거하고, 법에 명시되지 않은 집회와 시위를 여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나는 '法'에 부여된 '성스러움'의 가치를 그다지 높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의 주된 내용은 '폭력의 구조에 성스러움의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배계층의 지배구조에 부여된 폭력성, '법'에 부여된 폭력성 등을 다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法'이란 지배자들의 이해구조에 부합하도록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사용된 하나의 도구일 따름이지 '절대 명제' 혹은 '절대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뜻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다시 서강대 이윤재 학생의 생각을 되짚어 본다. 합법과 불법을 나누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현실의 실정법에 있다' 그렇다면 실정 법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유효한 명제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인가? 이윤재 학생은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해야 한다. 법과 폭력의 구조에 대한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담론으로 이 문제가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알베르 까뮈 '불의보다는 무질서를 택하겠다'
프랑스에는 알베르 까뮈가 있다. '이방인'으로 유명한 소설가. 심지어 나조차 그 소설을 읽어 보았으니 뭐 유명하긴 한가 보다. 아무튼 그가 한 말이 있다 '불의보다는 무질서를 택하겠다'
무슨 말인고 하면 불의를 위해 질서를 지키기 보다는, 무질서를 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불의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말이 되겠다. (중언부언같지만 여튼 그렇다.) 법이란 무엇인가? '도로교통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다 '질서'에 관한 법률이다. 도로에서의 질서를 유지하고, 집회와 시위를 통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이다.
질서는 무엇인가. 질서는 과거에 있었고 어제에 있었던 것이 오늘도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어제 출근했던 사람이 오늘도 출근하고, 어제 다니던 차길로 오늘도 차가 다니고. 이것이 질서다. 이것이 법이다. 알베르 까뮈가 역설한 사실이 가슴에 와 닿는가? 굳이 감성에 호소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성에 호소해 보겠다. 아프리카에는 '두알라'라는 나라가 있다. 뭐 들어 보았든 안 들어 보았든 상관은 없다. 이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최빈곤국의 순위권에 손꼽히는 나라고, 세계적으로 독재로 악명이 높은 국가다. 대통령과 관료들은 자신을 이해관계를 위해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상식적이고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 뭔지 아는가? 상습적인 뇌물과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어마어마어마한 손실이다. 관료주의적이고 부패한 공무원들이 벌이는 행정들. 놀랍게도 이것이 그 나라의 '질서와 법'으로 통용되고 있다.
세계에서 '불법'적인 '독재'는 존재한 적이 없다. '독재'는 언제나 '합법'적이다. 믿을 수 없다고? -_-; 머리를 조금만 굴려봐라. 어느 미친 독재자가 스스로를 '불법'으로 규정하겠나.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법'과 '질서'를 자신의 구미와 이해관계에 맞추어 고쳐 나가는 것이 '독재자'들의 공통된 성질이다. 세상에 불법적인 독재는 없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때론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사회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이 잠재적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 경영학과에서 공부한다는 이윤재 학생이 답할 차례이다.
윌리엄 고드윈 '수상록'
'법'이라면 까빡 죽는 사람들이라면 못 믿을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심지어 '법' 없이 살아보자는 주장을 한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나키스트계열이고 그 중에 내가 아는 건 '윌리엄 고드윈'이다.
그는 심지어 '다수결'조차 거부했고 '결혼제도'에 대해서도 맹비난했다. '다수결'은 숫자놀음에 의한 횡포였고 '결혼제도'는 개인에 대한 사회의 억압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사표현과 자기결정의 자유에는 그 어떠한 집단적 전체적 제제가 가해져서도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심지어 그의 '유토피아'에는 교도소도 없다.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은 그 사람은 남은 생애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그의 '형벌'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포스트 모던에 들어서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요즘 한창 뜨는 싸이코 패스라든지)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도덕관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극단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세상에 '법'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당당한 개인이라면 '국가'와 '법'에 목매이지 말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다. '법'이라는 폭력에 부여된 '성스러움'에 기죽지 말고 그것을 의심하고, 언제든지 깨 부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시민'이다. (국민이 아니라 시민.)
공대생이 경영대생에게
나는 공대생이다. 그럼에도 경영대나 문대나 사회대나 어디든 간에 이야기와 소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 요즘이야 학문간에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사상이야 오죽하겠는가? 이제는 도저히 옛날의 잣대로는 사상을 가늠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진정한 '다원화'의 시대이며 진정한 '토론'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토론'의 시대에는 더 이상 조용한 날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문제와 사안에 관해서도 수십, 수백가지의 의견이 대립할 것이다. 그럼에도 결과는 나고야 말것이다.
결과가 나는 과정이 '마녀 사냥과 다수에 의한 소수의 묵살'이 될 수도 있고, '서로의 설득에 의한 타협과 합의'가 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되기를 바란다. 전자의 경우에는 우리가 이룩한 '민주사회'가 과거 '독재사회'의 기본 메커니즘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2008/06/05 - [생각] - 거리행진에 참가하는 조직에 대한 생각
2007/08/10 - [생각] - 집단과 개인의 긴장성에 대해서.



